2015년 3월 4일 수요일

은유법 비유법

하나님의 기쁨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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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11-10-25 20:19

비유해석의 논리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097  

성경에는 여러 문학의 장르가 있다. 역사, 시, 이야기, 편지, 비유등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장르가 문학, 시,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워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역사를 인간이 잘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여러 문학의 장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가지 장르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문학의 장르의 하나가 비유이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방법 중에서 비유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담론(discourse)은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비유의 수는 상당히 많으며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교훈 중의 삼분의 일이 비유로 추정한다. 로버트 H. 스타인, 오광만 옮김, <비유해석학>(도서출판 엠마오, 1993), 15. “No less than 35% of our Lord's teaching is in paarable. The amounts of parabolic teaching, vis-a-vis straight teaching, in the four Gospel sources are these: Mk:16%; Q:29%; M:43%; L:52%”( A.M. Hunter, Interppreting the Parables: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14:70).
이 글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법 중에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 데 예수님은 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는가? 비유는 무엇인가? 비유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비유 전반에 대한 이해에 기초를 둔다. 마지막에 두가지 비유를 언어적인 접근방법을 시도하여 비유해석을 시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유해석의 논리를 살피게 될 것이다. 언어적인 접근방법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전제제하며 성경 언어의 사용을 문맥에서 살피므로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둘 것이다. 

I. 비유의 정의

로버트 스타인은 비유란 “천상적인 의미를 지닌 세상의 이야기”(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라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 비유에 대한 정의가 완전한 것이 아닐지라도 이해의 인식이 완숙하지 못한 어린애들에게 가르쳐진 점에서 본다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란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천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어사전 혹은 백과 사전에서 내린 비유의 정의는 대체적으로 “어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짤막한 우화(allegorical story)”나 “도덕적, 영적 진리를 밝히기 위해 일상 생활의 사건들, 혹은 사실들을 사용한 간단한 이야기”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보여지는 특성을 보면 도덕적 영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사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통해서 도덕적인 교훈이나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유를 정의하는 것은 비유의 전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말하는 것에 불과이다.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이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적인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히브리적인 사상은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며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약 성경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점을 다 고려 해야함을 알 수 있다. 
희랍사상에 있어서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comparison). 예증(illustration), 유비(analogy)라는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희랍사상에서는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 예증, 유비라는 말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이 살으셨을 당시에 예수님의 모국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였다(마 6:24; 12:27; 13:33; 5:22; 10:25; 16:17; 막 9:47; 15:34; 3:17; 5:41; 14:36; 요 1: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희랍어를 알으셨을 개연성을 말하고 있다(막7:24-30, 31f; 15:f). 예수님에게 있어서 파라볼레가 무슨 의미를 가졌지는 알기위해서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파라볼레라는 말이 희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파라볼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마샬(לשׁמ)이며 아람어로는 마슬라(malthla)라는 말이다. 주전 2-3세기에 경에 희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성경이 70인 성경 혹은 셉투젠트(Septuagint/LXX)이다. 이 성경에서 희브리어 마샬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라볼레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파랄볼레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마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봐야한다.

II. 구약에서 마샬(לשׁמ)의 의미

구약에서 마샬이라는 단어는 ~과같다(to be like)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선지자 에스겔은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לשׁמי)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16:44)에서나 삼상 12:12에서 “그곳의 어떤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לשׁמל)이 되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12:12). “내가 입을 열고 비유(לשׁמ)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편 78:2). 이와같이 구약에서 마살의 의미는 속담(proverb/잠언)의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마샬은 웃음거리 말(byword),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소의 말(word of derision)을 언급하기도 한다. 로버트 H. 스타인, <비유해석학>, 18.

III. 신약에서 파라볼레의 의미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파라볼레라는 용어의 의미는 속담(잠언/proverb)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παραβολη)을 인증하여 내가 말하기를...”(눅4:23) 뿐만아니라, 파라볼레는 비유적 말(figurative saying) 혹은 은유적인 비유(metapho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은유와 직유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는 극소이다. 은유는 두 상이한 사이의 은근한 비교(implicit comparison)를 말하는 반면 직유(simile)는 ~(like) ~같이(as), 마치 ~인 것처럼(as if), ~보이다(seems)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직접적인 비교(explicit comparison)를 말한다. 비유적인 말이란 이와같은 것의 확장(expansion)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갈길로 갓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에서 우리는 양 다 같아서라는 말은 직유(simile)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6)에서 “누룩”은 은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Rhetoric) 2권 20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직유와 은유의 차이점이 극소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유도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의 차이란 극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아킬레스(Achilles)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사자처럼 질주했다”고 했다면 이는 직유이지만, 만약 그가 “사자”, 그가 질주하였다고 했다면 이는 은유가 된다. 직유나 은유로 표현된 것 모두가 용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아킬레스(Achilles)를 그 의미가 내포된 사자라고 부른다(Loeb). Robert W. Funk Language , Hermeneutic, and Word of God(Harper & Row, 1960), 137. 펑크에 의하면 직유는 단순히 예증적인 것인 반면에 은유는 의미의 창조, 즉 의미가 발견되어지는 수단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에서 직유와 은유는 극소의 차이가 있다 했다. 그러나 직유와 은유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라는 문장과 “나는 선한 목자와 같다”에서 전자는 확장된 은유(παροιμια/ 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이며 후자는 직유이다. 전자나 후자에 있어서 “나”는 예수님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와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같다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말은 요한 복음에서 보면 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직접 버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와 같다는 말에서는 유일하신 선한 목자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슴을 버리는 사람) 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직유는 예증적이지만 은유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비유에 있어서 직유와 은유는 한가지 점을 비교함에 있어서 직유는 직접비교하며 은유는 은근히 비교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다. 비유에 있어서 직유가 명백한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 그림(picture)의 차원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이를 유사비유(similitude)라 하며 그림의 차원에서 이야기 차원으로 발전될 경우 이를 우리는 이야기식 비유(story-parable)라 한다. A.M. Hunter는 이야기식 비유와 유사비유의 차이를 말하면서 유사비유란 서로 유사한 진리나 과정을 기초로 하는 반면 이야기식 비유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에 즉 과거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A.M. Hunter,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 14:72.
예를 들면 잃은 양의 비유는 유사 비유이지만 탕자의 비유는 이야기식 비유이다.

IV. 비유와 풍유(allegory)

비유와 풍유는 하나의 문학의 장르라는 점에 있어서는 풍유나 비유가 비슷하다. 비유는 대체로 보다 길어진 직유의 한 형식이지만 풍유는 보다 길어진 은유의 한 형식이다. 마이클슨은 비유와 은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A. 버클리 마이켈슨, 성경해석학, 김인환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301-2.

은유 풍유

1.하나의 주동사 1.복수의 주동사와 시제의 혼합
2.직접적 비교 2.직접적 비교
3.비유적으로 사용된 말 3.비유적으로 사용된 말들
4.복수의 비교점들
5.보통 시간과 상관없는 진리 강조
6.지시된 특수한 사물과 동일 시된 심상
7.기사가 특수한 진리를 가르 칠 수 있도록 사실적 경험 과 비사실적 경험을 혼합시 킨 이야기
8.심상이 왜 실재와 동일시되 는지 그리고 어떤 특수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는지 를 보여 줌으로 설명 

그러나 그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의미르 가지고 있다. 비유는 인간의 일상생활에 기초해 있고 단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풍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이 그 일례이다. 번연은 많은 풍유를 사용하여 거룩한 순례자의 여정을 실감있게 이야기식으로 묘사한다. 

V. 비유의 목적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문학의 장르를 사용하셔서 무리들과 바리세인 서기관들에게 천국에 대한 교훈을 주셨다. 문제는 성경에 여러가지 문학의 장르가 있는데 왜 하필 비유를 사용하여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셨는가이다. 여기에 비유의 독창성이 있다.

i)감추인 것을 드러냄

마태복음서 13: 34-35에서 마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마태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譬喩)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ερευξουμαι κεκρυμμενα απο καταβολης κοσμου)함을 이루러 하심이라”(마13:34-35). 마태는 시편 78:2절을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롤 말씀하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시편 78:2-3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에서 비유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샬(לשׁמ)이다. 시편기자에 의하면 마샬을 사용하여 감추어진 옛 비밀을 선포한다(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from of old)는 말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비유란 창세때 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유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을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실감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말하거나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 은혜, 심판, 보호하심, 인도하심, 통치, 주권, 부르심등을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셨다. 여기에 비유의 독창성이 있다. 

ii) 마음의 깨우침(to awaken the heart of human being) 

비유는 알레고리처럼 직접적인 대화방법(a form of indirect communication)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a direct form of communication)이다. 알레고리는 독자가 알레고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심볼)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는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천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서 독자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며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것을 새롭게 보게(seeing something in a new way)한다. 즉 비유는 거울과 같은 역활을 한다. 비유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아니라 독자의 잠재력을 발동시켜서 비유에서 보여준대로 살도록 도전한다. 즉 결단을 촉구한다. 따라서, 비유해석이란 청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비유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Sallie McFague, Speaking in Parables(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5), 77.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겐 비유가 의미가 있지만 비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 의미가 은폐(to conceal) 됨을 말씀하셨다(마 13:11-17). 비유를 이해하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한다. “들을 귀”란 은유로서 육신적인 귀를 의미하지 않은다. 성령님의 조명과 감화에 의해서 들을 귀가 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늘 들을 귀가 있는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깨우치다”란 말은 희랍어로 수니에미(συνιημι)로서 “함께 모으다”(bring togather)라는 말에서 왔다. 신약에서는 26번이 나오며 그중에 18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마태복음9번, 마가복음 5번, 누가복음 4번).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수니에미는 은유적인 의미로사용되며 동사로서는 “이해하다,” 그리고 명사로서는 “영적인 통찰력”(spiritual insight)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메세지와 관련을 갖고 있다.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3, Hortst Balz and Gehard Schneider(Mich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3), 307.
예수님은 듣어도 깨닫지 못한다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마13:15). 마태복음 13:15에서 눈으로 보며,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이해한다라는 문맥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보다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마음으로 이해하란 중요한 의미르 가지고 있다. 마음으로 이해란 깊은 이해를 의미한다.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자신은 로마의 서사 시인 버질을 마음으로 이해했다고 고백했다. 칼빈도 그의 회심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깊은 이해란 사랑의 단계에 접어들어야 한다. 관계에서도 사랑의 관계성이 가장 깊은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을 잘 알고 신학도 공부한 사람이 말하는데 성경을 읽는데 재미가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재미로 읽어야 하는가? 재미로 읽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만화책은 재미로 읽지만 성경은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며, 책망을 받으며, 책망받은 것을 고치며, 의으로운 생활을 훈련을 받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딤후 3:16-17). 따라서, 깨우침이란 비유에 의해서 자신이 해석되어져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알게된 그 말씀대로 살므로서 얻어지는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는 거울과 같이 우리 자신을 사회를 기독교 공동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iii) 사실성과 생동감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청자에게 생동감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묘사해준다. 가령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 그냥 예쁘다하면 얼마나 예쁜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달처럼 예쁘다고 할 때 “예쁘다” 말은 얼마나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탕자의 이야기식 비유처럼 집을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식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묘사할 수 있는가? 

VI.비유의 해석사 

비유의 해석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해서 풍유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안디옥학파에서는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방법을 시도 했다. 전자는 비유에서 한가지 의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말에 있는 여러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그 일레가 성 어거스틴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풍유적인 해석을 들 수 있다. 후자는 문자적인 의미를 선호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마태복음 설교에서 비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비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Chrisostom Homilies on Gospel of Saint Mathew, Philip Schaff ed.(Hendrickson Publishers, 1994), 392, 394. Matt. 18:34, 35; Matt. 19:27(The saying is parable, wherefore neither it it right to inquire curiously into all things in parbles word by word, but when we have learnt theobject for which it was coomposed, to reap this, and not to busy one's self about anthing further).
종교개혁에 이르러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풍유적인 해석에 반대해서 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루터는 자기의 주장에 일관성을 결여하여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비유해석은 일관성이 있고 비유해석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칼빈은 그의 공관복음서 주석에 있어서 비유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그는 포도원 비유(마20:1-16)의 주석에서 “이 비유의 내용을 상세하게 조사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호기심의 발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게서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 John Calvin, Cal

고난과 십자가 없는 한국교회 & 두리반 투쟁의 증인 유채림 작가 (CBS 크리스천NOW 21회): http://youtu.be/RbT_G1mMY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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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십자가 고난! (강추영상): http://youtu.be/vfOvC0jOf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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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려" 전쟁터에서 큰 싸움을 치르다가 심하게 부상당한 병사가 애타게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병사의 수통에 약간의 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부상당한 동료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수통을 받은 병사는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불현듯 주변에 있는 병사들의 눈길이 모두 자신이 들고 있는 수통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는 차마 혼자만 물을 마실수가 없없습니다. 그래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신후 수통의 임자에게 수통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수통의 임자가 수통을 받아들고 보니 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상 당한 병사의 마음을 짐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소리를 내며 달디단 표정으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는 척하고는 옆에 있던 다른 병사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이어 병사들이 전원 돌아가며 수통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수통은 본래의 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수통의 물은 처음과 같은 양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부대에는 더 이상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배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아름 다운 일화입니다. 부대원의 목을 다 축이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수통의 물처럼 사랑과 배려는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사람을 더 많이 따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먼저 이해하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배려가 흐르면 그 사회는 발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배려가 없으면 시기와 질투와 싸움이 끊치지 않습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하루 되내시길 바랍니다.

"사랑과 배려" 전쟁터에서 큰 싸움을 치르다가 심하게 부상당한 병사가 애타게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병사의 수통에 약간의 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부상당한 동료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수통을 받은 병사는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불현듯 주변에 있는 병사들의 눈길이 모두 자신이 들고 있는 수통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는 차마 혼자만 물을 마실수가 없없습니다. 그래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신후 수통의 임자에게 수통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수통의 임자가 수통을 받아들고 보니 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상 당한 병사의 마음을 짐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소리를 내며 달디단 표정으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는 척하고는 옆에 있던 다른 병사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이어 병사들이 전원 돌아가며 수통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수통은 본래의 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수통의 물은 처음과 같은 양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부대에는 더 이상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배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아름 다운 일화입니다. 부대원의 목을 다 축이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수통의 물처럼 사랑과 배려는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사람을 더 많이 따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먼저 이해하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배려가 흐르면 그 사회는 발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배려가 없으면 시기와 질투와 싸움이 끊치지 않습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하루 되내시길 바랍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11:25

나의 새아버지 얼굴입니다.천사의가면을 드디어 벗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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