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패전 원인」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인물
2명을 꼽는다면 당연히 김일성,
이승만을 꼽을 것입니다
한 명 더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국민들은 멕아더를 꼽겠죠
그러나 저는 '유재흥'을 꼽습니다
한국전쟁에서 100여 국 이상의
UN 회원국의 간접 지원과
전투부대 파견 직접 참전 17개국,
의료 지원 5개국, 물자 지원
32개국 총 54개국과 비공식으로
비밀 참전한 일본을 포함하면
총 55개국의 지원을 받은
남한과 미국이
중공, 소련 단 두 나라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게 패한 여러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유재흥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불과 3일만에
한강 다리를 끊고 도주한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
그나마도 도망치는 날까지
"절대 후퇴 안한다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들
속이고 야반도주한 후 한강다리
폭파시켜 시민들은 피난 못가고
북한군 치하에 갇히게 해놓고서
서울 수복 후에 맨처음 한 일이
"왜 피난 안갔냐?"며 빨갱이로
몰아 대학살을 자행한 이승만
[전쟁 3일만의 피난, 그 16일 후]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를 써
‘대신 군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승만 대통령
편지는 내용은 물론
뉘앙스까지 굴욕적이었다.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의
지휘권 일체를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며…..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작전통제권은
이렇듯 허망하게 유엔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얼마나 황당했는지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the most remarkable
concession of sovereignty
in the entire world”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
그래서일까??
유엔군은 전작권이 이양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형식적으로
나마 한국군 지휘부를 통해
명령을 하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불과 10여 개월 후]
한국군 3군단은 수적, 물적
우위에 있는 상태임에도 현리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된다.
(현리 전투) 패배로 인해
한국군에 대한 UN군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지고 이를 계기로
형식적으로나마 존중되던
지휘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현리 전투]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으로 물리고, 유엔군과
국군이 (지역을 나누어 맞는)
방어전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과 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으로 공격을 지시합니다.
(팽덕회는 참전 이래 한국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했고, 주로
한국군 방어지역을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7사단 및
8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병력의 60%가 사망,실종,포로)
심지어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합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예비사단인 6사단을 이끌고있던
한국군 (2군단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는 7, 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중공군의 1951년 설날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1951년 봄에는 휴전선 인근
지역까지 전선을 밀어 올립니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
(워커 중장의 후임)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
(보병 3사단, 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지역에
배치합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지역 공격을 선택합니다.
중공군은 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한 후
공세를 시작함으로서, 국군은
중공군에 포위됩니다.
이 때, 아주 놀라운,
세계 전쟁사에 다시 없을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최고 책임자인 3군단장이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통채로 떠넘기고,
부하들을 몽땅 남겨 둔 채,
비행기를 타고 도주해 버립니다.
당연히, 3군단은 괘멸되었고,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또는 포로가됩니다
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힌 국군 포로 중에,
그 유명한 '조창호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창호 소위는 북한에서 탈출,
극적으로 조국으로 돌아 와 그
때까지 살아있던 3군단장에게
지속적으로 면담을 요청합니다.
그 때 왜 부하들을 내팽겨치고
도망갔는지 물어보려고....
그러나, 3군단장은 끝끝내
조장호 소위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백전노장 밴플리트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군 지휘관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지휘권을 연합군에
통채로 넘기라고 요구하였고,
이승만은
'작전권을 넘기겠습니다'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에게 줍니다
이게 국방자주권을 통채로 넘긴
'작전 통제권 이양'이며,
이 때부터 한국군은 유엔군의
(예속부대)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한국군 2군단장과 현리전투에서
도망친 한국군 제3군단장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유재흥' 중장입니다.
유재흥 중장은 이렇게
한국전쟁사에 지울 수 없는
패전 2건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현리전투 패전이후,
밴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의
기가막힌 대화내용입니다.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그 많은
부하와 포와 장비를
몽땅 잃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짓을 했는데도,
유재흥은 군법회의에 회부
되기는 커녕, 이승만 밑에서
참모총장대리까지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박정희는 5·16 군사 반란으로
집권하자 유재흥을 국방장관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정말 더욱 더 황당한 것은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유재흥은
일본군 장교 유승렬의 아들인데,
유승렬은 아들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해 어려서
부터 한국말을 전혀 못하게 해서
유재흥은 한국말을 못했으며,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유재흥도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던,
최악질 친일파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 7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앗긴
작전통제권의 환수를 본인이
스스로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유재흥은 2011년 사망하였고,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도,
자칭 보수 (수구꼴통)들은
이승만을 '국부'라 떠벌리며
입만 열면 안보를 부르짖고
투표 때
이 자들을 찍는 사람들은
(안보)때문에 찍는다는 나라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후손들에게 물려 줄
전시작전권도 없는,
내 나라도 내가 못지키는
대한민국입니다
노무현대통령 국방관련 명연설
-2006. 12. 21-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https://m.youtube.com/watch?v=KNbw8RP_8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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